한국은 1947년 8월 해방 이후 독도에 대한 본격적인 1차 학술조사를 실시했 는데 역사학자로 당시 국사관 부관장 申奭鎬가 참여했다. 그 후 추가적으로 독도에 관한 다양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학술 연구는 1965년 역사 적, 국제법적, 지리적 분야의 독도 관련 연구를 편찬한
[상세정보]
이칭별칭 치암(痴菴) 寺谷修三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4년(고종 41) 1월 22일 ~ 1981년 2월 13일
성격 역사학자
출신지 경상북도 봉화
성별 남
본관 아주(鵝洲)
저서(작품) 국사신강 조선사료해설집 홍의장군 등
대표관직(경력)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진단학회 발기인 국사관 사무국장 고려대 교수 문교부 편수국장 성균관대 교수 학술원 회원 한국사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발기인 한국사연구회 회장 영남대 교수
[정의]
1904(고종 41)∼1981. 역사학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치암(痴菴)이다. 1904년 경상북도봉화에서 출생했다.
[활동 사항]
1910년부터 홍치유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8년 4월 경북 봉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1운동과 관련되어 1919년 6월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1921년 3월까지 수학했다.
귀국 후 1921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 1924년 3월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2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6년 3월 수료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29년 3월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1930년 8월에는 청구학회의 편집위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다. 한편 1934년 진단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40년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해방 직후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해방 후 일제가 없애려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유리원판을 소각 직전에 빼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밝히는데 기여했다. 또 이 자료에 기초해 해방 후 한국사 연구기관의 모태가 된 국사관(현 국사편찬위원회)을 창설했다. 해방 직후 근현대 일본측 자료에 가장 정통한 학자 중 한명이었다. 1947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했다.
1948년 12월 역사잡지 《사해》에 한국의 독도 영유권 역사를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은 이후 독도 연구는 물론 한국의 독도 인식과 정책의 기본적인 골조를 세워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1945년 8월 진단학회 상임위원 10월 조선역사협회 부회장 12월 조선사연구회 부회장이 되었다.
1946년 1월에는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강사로 활동했고 3월에는 국사관을 설립 9월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3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7년 1월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수요목제정위원 2월에는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었다. 1949년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
195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겸임했으며 1954년 제1회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에는 독립유공자상훈심의위원회 위원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5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7년 12월 한국사연구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2월 13일 사망했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 《국사신강》(공저 1957) 《조선사료해설집》(1964) 《홍의장군》(197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