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인 류도수의 시문집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태곡리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병촌(屛村) 류태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태계(迨溪) 류숭조(柳崧祚)이며, 아버지는 류진구이고, 어머니는선성 김씨로 김낙생(金樂生)의 딸이다. 부인은 의성 김씨로 김남운 (金南運)의 딸이다. 7세에 곡구(谷口) 류낙기(柳樂祈)에게 수학하였고, 이어 계당(溪堂) 류주목의 문하에서 배웠다.
박최수(朴最壽)․김세호(金世鎬)․김창준(金昌濬)․조만혁(趙萬赫)․한규직(韓圭稷)․원세창(元世昌) 등 여러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874(고종 11)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것은 국가를 위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유림 소를 올렸다가, 1875(고종 12)년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귀양을 갔다. 1880(고종 17)년 강원도 평해 지역으로 이배되었다가, 1882(고종 19)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두문불출하며 세상일에 뜻을버리고, 후진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889(고종 26)년에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로는 『북천근포록(北遷芹曝錄)』, 『유배일기(流配日記)』등이 전한다.
이 문집은 1897(광무 1)년에 주영(宙榮)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문집중 서(書)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저자의 정치․성리학․예설 등에 대한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상계당선생(上溪堂先生)」은그의 스승인 류주목에게 보낸 것으로, 국가를 오래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정도를 지키고 사설을 용납하지않으며, 백성의 풍속을 바로잡고 군대를 훈련 시켜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였다.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는 1875년 벗과 함께 칠보산을 유람하고 지은 여행기로, 길을 떠났을때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노정과 주위의 경관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도 성리학의 내용을 설명하고경전의 어려운 곳을 풀이 하여 설명한 「여족제선여도성(與族弟善汝道性)」이있고, 시로 주위의 풍경을 잘 묘사한 「복차 서애선생강재십영(伏次西厓先生江齋十詠)」이 있다.